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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인간-환경’ 사이의 횡단, 가속, 양육






들어가며: 기후위기에서 색다른 주체성 생산은 가능한가?


“향후 1.5℃ 티핑포인트(Tipping Point)까지 10년 남았다” 2018년 호주기후복원센터의 이러한 보고는, 우리를 기후위기라는 막대한 상황 앞에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든다. 일각에서는 자괴감과 비관에 휩싸여 “인간에게는 더 이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 또 일각에서는 “탈성장이라는 질서 있는 퇴각과 문명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비관과 낙관 사이에서 기술, 인간, 환경과 융합되어 있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 기술과 인간, 환경은 서로 어우러진 합성현실, 중간현실, 융합현실을 이루기 때문에, 따로 떼어 놓고 볼 수 없다. 기후위기는 인간활동이 만들어낸 산물이지만, 기술적 해결책만으로 그것이 극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술은 늘 대체제가 아니라 보완제이기 때문이다. 기술과 결합된 인간의 양상은 우리의 생활세계를 복잡하게 기능분화하고 있다. 반면 자연과 생명은 우리를 감싸고도는 둘레환경이며 미분화(未分化)되어 있고 다기능적이다. 그래서 빠르게 가속화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임계점은 우리의 신체, 자연, 생명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 재빠른 기술의 가속화 속에서 사이보그, 포스트휴먼, 트랜스 휴먼 등 새로운 양상의 주체성이 등장하고 있는 현실은, 바로 우리를 둘러싼 둘레환경을 아끼고 보살피며 돌볼 양육자로서의 주체성의 모습과 형태, 양상이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기술의 가속화가 낳은 미래적 지혜의 재구성적 과정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에 의해 자연이 심각하게 훼손된 상황에서 몸에 털이 자라듯 자연은 스스로 회복될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술, 인간, 환경에 대한 구성적 실천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기술의 변화, 환경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이미 달라져 있지만, 더욱 사랑할수록, 연대할수록, 욕망할수록 달라질 수밖에 없는 정동(affect)에 기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1. 횡단(transverse) : 포스트휴먼 담론과 혼종적 주체성 양상


근세의 르네상스(Renaissance)는 문예부흥, 예술부흥, 인문주의를 기치로 인간을 우주의 중심이자 자연과 생명을 통치할 수 있을 만큼 교양을 가진 존재로 승격시켜 놓았다. 이에 따라 근대의 칸트는 신 중심의 초월적인(transcendent)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선험론적인(transcendental) 세계관으로 이행을 통해 자연과 생명이라는 대상에서 인간의 인식주관으로 돌아가는 ‘코페르니쿠스 전회’(Copernican Revolution)를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는 인식론, 존재론, 논리학의 구도를 통해서 어떻게 인간이 자연과 생명과 독립적인 존재와 인식과 논리를 갖고 있는지를 입증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책임, 역할, 직분, 기능을 달성하는 주체(subject)를 등장시키면서 근대 특유의 이분법으로서의 주체와 대상의 첨예한 분할선, 이접(disjunction)적 자기조직화 방식을 탄생시켰다. 그 이후 근대는 경계, 구획, 문턱을 인간과 자연, 생명, 기계 사이에 명확히 두려고 노력해 왔다.
⠀⠀⠀ 그러나 4차 산업혁명, 디지털 뉴딜, 언텍트 시대가 도래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최종적인 사망선고라고 할 정도로 자연, 생명, 기계와 독립적인 인간주체에 대한 회의가 이루어졌다. 초지능, 초연결, 초융합사회로의 진입, 사물인터넷, 빅데이터와 이를 기반으로 한 AI, 드론, 4D, 3D컴퓨터, 5G, 플랫폼, 메타버스까지 등장한 첨단기술사회는 인간 자체를 가상현실과 결합된 ‘인간-기계’ 양상으로 만들어냈다. 동시에 인간 자체가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등과 공생명체를 구성하는 ‘인간-미생물’ 양상 속에서 방역과 면역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우리가 포스트코로나 시대 배달플랫폼을 통해 음식을 주문할 때, 자본주의 초기부터 확산시켜 왔던 사물의 권리를 지탱하는 전지구적인 물류유통인 로지스틱스(logistics)에서의 ‘인간-사물’ 양상도 등장한다. 또한 반려종과의 공생진화의 과정을 문명 내부의 생명권으로 확장시켜 내면서도 기후난민, 제 3세계 민중 등을 문명 외부로 분리시키는 ‘인간-생명’의 색다른 양상도 만들어졌다. 이 모든 혼종적인 양상들은 인간 종이 자연, 생명, 사물, 기계, 미생물과 독립적인 존재였던 적이 없으며, 함께 공생하는 횡단적인 주체성(subjectivity)이었음을 의미한다.
⠀⠀⠀ 포스트휴먼의 AI와 그 작동방식인 딥 러닝(Deep-learning)은 기존 컴퓨팅의 계산방식을 넘어서는 확률론적이고 학습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산되어진 기계의 양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 능력의 한계를 넘어선 인공지능의 등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또한 존재한다. 다시 말해 기후위기 상황에서 인간을 더욱 뺄셈하는 에코파시즘이나 기후난민을 배제하는 분리주의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인간 자체를 노동환경이나 작업장에서 축출하고 긱경제에 기반한 플랫폼에 배치하거나 아예 뺄셈해 버리는 기술파시즘의 등장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미래가 없고, 더 이상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절망감이 확산되는 것이다. 물론 근대적인 파시즘은 생명을 도구화함으로써 신체로 연결된 소수자를 차별하고 노동자를 착취하고 장애인 분리하는 양상의 도구주의적 파시즘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생명력과 활력은 플랫폼자본주의의 새로운 천연자원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 정동을 동원하여 플랫폼에서 웃고 울고 즐기고 향유하면 그 모든 이득은 플랫폼이 가져가는 플랫폼자본주의, 또는 정동자본주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술, 인간, 환경을 둘러싼 혼종적인 주체성의 정동의 미시정치에 기반한 반파시즘운동은 이제 시작점에 있다.


2. 가속(accelerate) : 사이보그들의 전략적 지도제작


알렉스 윌리엄스(Alex Williams) & 닉 스르니체크(Nick Srnicek)의 「가속주의자 정치를 위한 선언(Manifesto for an Accelerationist Politics)」
1 https://brunch.co.kr/@bearnut/15
이 발표되면서 가속주의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가속주의는 과학기술의 가속적인 발전이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우파 가속주의와, 과학기술의 가속적인 발전이 자본주의를 주파하고 붕괴시키는 좌파 가속주의로 나누어진다. 사실상 들뢰즈와 가타리의 탈주선과 절대적 탈영토화 개념이 후자를 선도했던 측면이 있다. 이러한 가속주의 전략은 결국 기후위기 시대에 무수한 혼종적 주체성 양상 중 하나인 사이보그들의 전략적 지도제작의 시작점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 그 첫 번째 전략은 통화주의 전략이다. MMT(Modern Monetary Theory)와 같은 전략이 알려준 것과 같이 국가신용을 통해 돈을 찍어 기본소득 등으로 직접 시민에게 나누는 것이, 양적 완화를 통해서 기업과 은행을 거쳐 나누는 부채신용보다는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MMT는 탈성장과 같은 감속주의에 위배되는 역설적인 측면이 있다. 지금까지의 대안운동이 탈성장, 감축, 유한성, 한계, 가난, 무소유 등과 같은 의도적 게토화 전략에 기반한 일관된 목소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MMT의 가속주의는 의외의 전략이다. 오히려 자본은 새로운 상품을 팔기 위해서 의도적 진부화를 통해서 가속주의를 전개해 왔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 두 번째는 펠릭스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2014, 민음사)에서의 가속주의 전략에 대한 재발명에 있다. 펠릭스 가타리는 민주주의의 가속화 과정이 부르주아 혁명에 머물게 되었던 바가 봉건제를 불철저하게 넘어서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 이를 오이디푸스라는 아버지의 권력 표상의 현존으로 바라본다. 이 결과 자본과 권력이라는 봉건제의 잔존물이 온존하게 되고 이를 넘어서는 무의식이 고아인 아이들로서의 현대인들의 민주주의의 가속화가 자본주의를 주파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과학기술의 가속화 역시도 어느 임계치까지는 자본주의와 성장주의에 복무하겠지만, 임계치 이상이 되면 사실상 이를 완전히 분쇄하고 해체할 수 있는 탈주선으로 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기후위기 시대의 과학기술에 대한 재전유와 자본과 권력을 분쇄할 기술의 가속주의는 생태민주주의와 과학기술이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서 생명, 자연, 기계의 혼종적 주체성 양상이 얼마나 가속화되어 나타날 것인가의 여부에 달린 것이다.
⠀⠀⠀ 세 번째는 플랫폼자본주의, 즉 정동자본주의의 가속주의에 따른 내파이다. 플랫폼은 정동을 추출하고 채굴하고 이를 활용하여 이득으로 남기려는 새로운 양상의 판(plan)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동자본주의 양상은 활력과 생명력으로서의 정동을 추출하지만, 그것이 증폭되어 하나의 흐름(flux)로 나타나는 것을 완벽히 제어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정동자본주의는 인지부조화라고 할 정도의 확률론, 모방, 쏠림, 따라 하기 등의 양상을 장착하고 있다. 플랫폼에서 인플루언서라고 지칭되는 권력(power)은 활력(force)과 함께 생겨나는데, 이는 동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모방과 쏠림이라는 정동의 가속화는 완전히 정동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전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점에서 플랫폼자본주의는 가장 불확실하고 안정적이지 못한 시스템이 장착된 상황이라고 평가될 수 있으며, 정동의 흐름의 가속화를 담아내기 어려운 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후위기에 맞선 탈성장의 국면은 활력의 저하, 결핍, 부족의 시대가 아니라, 정동의 해방, 활력의 해방을 통해서 플랫폼을 내파하는 상황을 의미할 것이다.


3. 양육(Stewardship) : 둘레환경을 돌보는 양육자로서의 구성적 인간론


기술, 환경, 인간의 생태계의 구성에 따라 인간은 구성될 것이다. 인간이 미리 주어진 전제조건이었던 근대사회에서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역시도 공동체, 사회, 인간을 소모하고 소비할 대상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의미를 부여하여 공지를 올리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던 그런 낭만적인 시대는 지나갔고, 가게 문만 열면 손님이 저절로 찾아오던 자발성의 신화는 사라진 지 오래다. 오히려 돌보고 양육하고 도모하고 부추기는 양육자의 마인드, 스류어드십이 화두가 될 수밖에 없다. 혼종적 주체성은 이러한 양육자의 마인드를 갖고 사물, 생명, 자연, 인간을 돌보고 양육하고 보호하는 색다른 주체성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성적 인간이며, 동시에 혼종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의 구성적 인간이다. 
⠀⠀⠀ 구성적 인간론은 불교의 심원한 사상에도 내재해 있다. “꼼짝 안할 때 생각이 많은가? 움직일 때 생각이 많은가?”라는 질문을 접하면 우리는 꼼짝 안할 때 망상이나 무수한 잡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꼼짝 안할 때의 생각들’인 감정, 기분, 망상, 정서 등을 몰아내는 방법이 소승불교의 명상법들이다. 그러나 그 동전의 양면의 프레임으로부터 한 치 앞도 벗어나지 않는다면 사회와의 교류는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움직일 때 생각들’ 다시 말해 정동의 일련의 과정들인 양육하고 모시고 섬기고 돌보는 보살행(菩薩行)과 보시(普施) 개념으로 나아갈 때라야 비로소 대승불교와의 접속이 가능하다. 결국 움직일 때의 생각인 정동을 어떻게 순환하고 상호작용하고 흐름으로 만들어낼 것인가가 화두였던 대승불교와 같이 구성적 인간론에서도 이것이 핵심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정동자본주의는 정동의 잠재력에 대해서 자본과 권력이 주목하면서 이를 천연자원처럼 추출하고 채굴하는 자본주의 양상이다. 그러나 정동이 사랑이자 욕망이기 때문에 이를 추출하고 이용하려고 해도 혼종적 주체성 양상으로 재특이화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게 된다.
⠀⠀⠀ 구성적 인간론은 혼종적 주체성이 어떻게 생산되고 활동하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① 베이트슨의 ‘생태계의 특이점으로서의 구성적 인간론’은 브뤼노 라투르의 ANT(Actor Network Theory)와 들뢰즈와 가타리의 배치(agencement)을 선도하는 측면이 있다. 모종의 복잡성 속에서 다이내믹 시스템이 가능하다는 통찰은 구성적 인간론에 힌트를 준다. ② 피터싱어의 ‘동물의 대리인으로서의 구성적 인간론’은 동물을 모두 반려종으로 바라보면서 이를 대변할 구성적 인간을 요청하며 생명만 가진 자로서의 장애인이나 식물인간 등에 대한 윤리적이고 구성적인 기초 역시도 제공한다. ③ 웬델 베리의 ‘대지의 양육자로서의 구성적 인간론’은 소농이 기술을 테크네(Techne)라는 대지를 착취하고 이용하는 형태가 아니라, 포이에시스(Poiesis) 라는 대지를 양육하고 보살피는 형태로의 이행을 강조하면서 기술에 대한 구성적 인간론의 태도를 정립케 한다.


나오며 : 혼종적 주체성, 사물, 생명, 기계, 자연을 반려종화하자!


기후위기 시대에 혼종적 주체성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욱 가까워진 세계, 생명과 자연의 생태감수성의 확산, 기후위기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 속에서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따로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 안에 기계와 사물과 자연, 생명이 쌕쌕거리며 우리의 정동이 되어 드러난다. 우리는 피터 싱어의 가장자리 상황 논증(the Argument from Marginal Cases)처럼 생명과 사물 가장자리에 바이러스라는 신진대사를 하지 않지만 증식하고 복제복사되는 종이 있고, 인간과 생명 가장자리에 유인원이라는 IQ로 보자면 6세 아동의 지능을 가진 존재와 함께 살고 있다. 또 인간과 기계 가장자리에는 무수한 사이보그 양상을 드러내는 가상현실과 메타버스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명확히 구획되고 분리된 것은 없다. 우리는 융합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고, 횡단하고 있다. 이러한 혼종적 주체성은 우리의 존재력을 확장시킬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혼종적인 양상은 우리를 더욱 기후위기라는 상황 속에서 강건하고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게 한다. 우리는 기후위기 시대를 기술, 인간, 환경의 융합현실, 중간현실 속에서 하나의 구성적 실천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정동을 발휘해야 한다.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혼종적 주체성, 구성적 인간론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