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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세례를 받은 검은 욕망, 평평한 혼종 결합체, 그리고 예술적 상상력






기계는 파괴되었다. 공장은 불타올랐다. 1811년부터 1812년 사이에 영국에서는 천을 만드는 역직기(力織機)를 부수는 대규모 기계파괴운동, 즉 러다이트 운동(Luddite riots)이 있었다. 수많은 역직기가 이 시기에 파괴되었다. 산업혁명이 불러온 생산과정의 자동화는 결국 노동자가 기계를 파괴하는 행동을 불러왔다. 그렇다면 그 당시 노동자는 자신들의 일감을 빼앗아간 기계와 맞서 싸운 것인가? 몽상을 가미하여, 영화 《터미네이터》(1984)의 안드로이드 T-800처럼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나타난 기계를 파괴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망치를 들었던 것일까? 역사는 러다이트 운동을 계급투쟁으로 기록한다. 이 운동을 자본가의 노동 착취에 반기를 든 노동운동으로 평가한다. 결국, 이 폭력적 투쟁의 중심에는 인간 대 기계의 대립이 아니라, 노동자 대 자본가의 대립, 즉 인간의 계급 문제가 놓여 있다. 그리고 문제의 심연에는 자본의 축적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 무대의 두 주인공은 ‘인간’이었다.


기술혁신과 검은 욕망


소위 제4차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D.N.A(Data, Network, AI) 지능정보기술 기반 기술혁신은 우리의 생각뿐만 아니라 몸까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현실과 다른(혹은 현실과 연결된) 가상공간을 생각하게 되었고, 온라인 공간에서, 그리고 현실 공간에서도 부캐(부 캐릭터)의 삶을 살게 되었다. 우리는 다양한 디지털 보철물(스마트폰, 스마트워치, 블루투스 이어폰 및 헤드폰 등)로 몸의 감각을 확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너무 빠른 기술혁신에 대한 두려움은 종말론적인 전망을 양산하고, 신기술을 반대하는 네오 러다이트 운동(Neo-Luddism)으로 표출되고 있다. 인간의 지능보다 훨씬 우월한 인공지능 시스템이 결국 모든 기술 시스템을 장악하여 유기적이고 통합적인 네트워크형의 단일 유사 생명체가 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과, 그로 인해 인간은 기계에 지배당할 것이라는 인류 종말론의 시나리오가 끊임없이 미디어에서 쏟아지고 있다. 과연 우리의 기계에 지배당할 것인가? 지배당한다는 의미는 뭘까? 혹시 이미 우리는 기계에 지배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기계와 분리되어 있는가? 언제나 스마트폰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해 있는 ‘스마트폰-이용자’이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자동차-운전자’이고, 스마트워치를 차고 운동하는 ‘스마트워치-운동자’인 혼종 결합체(hybrid assemblage)로서 인간을 과연 기계와 분리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인간은 이질적인 존재들과 복잡하게 얽히고설켜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인간과 얽혀 있는 존재 중에는 ‘기계’나 비물질적인 ‘기술-과학’, 즉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실제 과학(Science in Action)』(1987)에서 명명했다―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지구 종말을 앞당기는 가장 문제적 존재는 인간이지, 기계라고 볼 수 없다.
⠀⠀⠀인간의 기술혁신 뒤에는 늘 ‘정복’이라는 검은 욕망이 있었다.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라는 시대 구분도 정복을 위한 무기와 연관되어 있으며, 19세기 산업혁명은 제국주의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근원적 원인이 되었다. 이후 두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냉전 시대가 도래했는데, 이 시기에 군사 기술 증강을 위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시스템 이론 등이 등장했고,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란 형태로 군사 기술이 산업화되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암호화된 메시지를 해독하기 위해 연구한 앨런 튜닝(Alan Turing)은 ‘튜링 머신(Turing Machine)’을 만들었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디지털 기술의 모델이 됐다. 그리고 1969년 미국 국방성이 시작한 ‘아파넷(Arpanet)’은 이제 40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인터넷이 됐으며, 미 해군연구소에서 미 공군이 운용하던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위성위치확인시스템)는 전 세계인이 사용하는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갔다. 기술이 단지 식민화나 전쟁 등의 인간 정복에만 쓰인 건 아니다. 자연 정복의 도구도 됐다. 화석연료 산업이나 벌목 산업, 공장제 축산 산업은 자연을 채굴 대상으로 삼아 무참히 깎아냈고, 이 후폭풍으로 지금 우리는 기후 위기라는 불구덩이로 한발 한발 내딛고 있다. 이렇듯 정복이라는 검은 욕망을 지닌 인간은 기술이라는 칼날을 사방으로 뻗고 있다. 이러한 행위의 동력은 결국 자본 축적을 향한 인간의 탐욕이다.


평평한 일원론적 우주


인간이 기술을 도구로 사용하여 모든 것을 정복하려는 것은 그 바탕에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주의는 종적 위계를 만들어 가장 윗자리에 인간이 앉아, 마치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휴머니즘(humanism, 인본주의)의 사생아이고, 휴머니즘은 이원론적 세계관, 즉 육체와 영혼이, 남성과 여성이, 백인과 유색인이, 자아와 타자가, 인간과 인간 외 세계가 구분되어 있다는 생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불변하고 완전한 정신계(영혼, 예술, 철학 등)와 가변적이고 불완전한 물질계(자연, 육체, 감각, 이성 등)로 나누는 이원론은 세상을 양분하여 둘 중 하나에 더 가치를 두는 사고방식을 고착화해 중심과 주변, 혹은 정복자와 정복 대상이라는 위계를 만들었다. 이원론적 사유와 위계 형성은 정복자를 영혼, 남성, 백인, 자아, 인간으로, 정복 대상을 육체, 여성, 유색인, 타자, 인간 외 세계(자연)로 설정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휴머니즘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기초로 인간의 우월성을 가정한 종적 위계 체계이다. 이 휴머니즘의 왕좌에는 유럽의 백인 남성이 앉아 있다. 하지만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말했듯이, 휴머니즘은 근대라는 특정 시대에 형성된 에피스테메(épistémè)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유럽-백인-남성-인간’의 생물학적·담론적·도덕적인 능력이 덧씌워진 근대적 교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근대적 사유인 휴머니즘은 변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외 세계를 구분하고 위계화하던 사유방식은 기술-과학의 발전과 기후 위기를 경험한 인간 주체가 인간 외의 존재, 즉 인간-아님(the non-human), 비인간(the inhuman), 반(反)인간(the anti-human)과 평평한(수평적) 관계를 맺고 공진화(coevolution)해야 함을 깨달으면서, 다양한 주체를 인정하고 다양성과 차이를 수용하는 ‘포스트휴머니즘’ 사유방식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또한, 인간의 관계에서 비인간 사물(기계, 장치 등)을 매개하지 않고는 상호작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구성할 수 없음을 인식한 인간은 ‘사회물질적인 것(the sociomaterial)’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 이것은 인간과 비인간이 상호 간에 영향을 주는 공동 구성(co-construction)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사회 구성체의 상호작용 변화에 대한 연구가 2000년대 초부터 부상하기 시작한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이다. ‘포스트휴머니즘’과 ‘신유물론’은 인간의 지배력과 특권적인 지위에 대한 믿음을 무력화하고, 이원론적 사유 방식을 벗어나 세상을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일원론(一原論)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성하고 있다. 위계 없는 평평한 일원론적 우주(monistic universe)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지구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가이아(Gaia) 이론이나 미세한 움직임이 다른 곳에 큰 영향을 준다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는 이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여 있음을 알려준다.
⠀⠀⠀포스트휴머니즘과 신유물론은 인간을 부식토로서의-인간(human-as-humus)으로 축소하기도 한다. (「사이보그 선언」으로 유명한 다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자신이 포스트휴머니스트가 아니라 퇴비주의자(compostist)라고 말했다는 걸 기억하라.) 신유물론의 대표주자인 라투르는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에서 인간을 이산화탄소나 한 개비의 담배, 한 포기의 풀, 고슴도치 등과 위계의 차이가 없는 행위자(actor), 혹은 행위소(actant)로 봤다. ANT에서는 이들 간의 구별이 그저 속성과 특징에 따른 것으로, 이들의 분배와 연결에 의해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관계를 맺을 뿐이다. 하지만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유물론』에서 신유물론에 관해 우려하며, 인간이 창조성과 동시에 파괴성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이 고슴도치보다 더 창조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인간이 고슴도치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라는 것을 무시할 위험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인류세』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이나 신유물론에서처럼 인간을 자연, 비인간 혹은 물질의 낮은 역량과 동일한 수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할 존재라고 말하며, “지구에 대한 증폭된 책임감”을 주장한다. 그렇다고 이글턴과 해밀턴이 다시 휴머니즘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신유물론이 인간의 짊어져야 할 문제를 마치 지구 전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의 문제처럼 인식시키고 있는데, 인간의 능력이 다른 개체와 동일하지 않기에 지구 전체에 대한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자본에 대항하는 인간-자연-기계-문화의 혼종 결합체 구성


문제는 기술혁신을 끌고 가는 핏빛 원료가 자본 축적을 향한 인간의 탐욕이라는 점이다. 공유 활동과 사용의 자원 관리 체제인 커먼즈(commons)는 어느 순간 전혀 다른 결을 지닌 공유경제(sharing economy)로 둔갑하여 플랫폼 자본주의의 먹잇감이 되었다. 분산 네트워크 시스템인 P2P(peer-to-peer network)는 커먼즈 전략 중 하나인데, 이 P2P를 기반으로 탄생한 블록체인(Block Chain) 기술은 대안적인 신용관계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가상화폐 광풍의 진원지가 되면서 새로운 투기 기술 중 하나로 변모했다. 빅 데이터는 ‘21세기 석유’라고 칭하며 수익을 보장하는 자원처럼 인식되고, 인터넷으로 전 세계의 지역 정보를 알려주는 ‘구글 어스(google earth)’는 가상의 부동산을 거래할 수 있는 ‘어스2(Earth2)’를 탄생시켰다. 우주산업은 600억 원이 넘는 민간 우주관광상품이 되었고(스페이스X), 줄기세포 연구는 많은 부분 화장품 제조나 미용성형수술에 활용되고 있다. 기후위기 속에서 ‘그린뉴딜’은 새로운 성장전략이자 정치적 구호가 되고 있으며, 기후위기의 불구덩이에서 벗어나고자 전 세계적으로 행하고 있는 ‘탄소중립(carbon neutrality)’ 운동은 시장주의가 스며들면서 탄소가격제에 의한 상쇄배출권 시장으로 변모했을 뿐만 아니라, 파생 금융상품들도 경쟁적으로 양산되며 투자종목이 되고 있다. 탄소중립이 시장금융상품으로 전락한 것이다. 또한, 최근 많은 기업이 환경보호(Environment), 사회공헌(Social), 윤리경영(Governance)을 가치로 내건 ESG 경영을 전면에 내걸고 있지만 결국 그들의 목표는 이윤추구다.
⠀⠀⠀인간-아님, 비인간, 반(反)인간 특성을 지닌 새로운 종(種, species)이 인간과 평평한 관계를 맺으려 다가서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은 자본 축적의 욕망에 사로잡혀 “지구 전체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어쩌면 이 세계의 주인은 인간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신도 아닐지 모른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주인은 자본인지도 모른다. 자본이라는 비물질적인 존재가 인간을 도구화하여 수평적 공동 구성을 와해시키고 있는 줄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이 주인처럼 보이는 무대를 감독하고 있는 무형의 존재는 인간의 탐욕을 흔드는 자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자본이 인간을 조정한다면, 우리는 다른 종의 도움을 받아 인간-자연-기계-문화의 혼종 결합체를 만들어 대항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혼종 결합체는 인간의 창조성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창조성은 예술의 상상력에서 구현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