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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육체를 횡단하는 물질들의 생태교향곡: 흙 되기, 인간되기, 문화의 자기조직화







팬데믹 이후로 지구의 육체는 소란스러워졌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린 아픔과 분노와 비참의 절규이면서 동시에 참회와 같은 독백이 섞인 모종의 언어들이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문제를 통해 인류에게 분명한 깨달음이 생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흔들자, 자연, 비인간, 인간의 몸을 횡단하는 물질들이 내지르는 말에 새롭게 귀 기울이게 된 것이다. 40억년 이상 노폐물과 사체를 자양분으로 하여 자라온 균류가 지구의 토양 속에서 쓰레기 청소를 해온 것과 달리, 몇 세대에 걸쳐 쓰레기를 배출하고 이주하면서 지구를 오염시켜온 인간에게 보내는 물질세계의 메시지는 단순한 잔소리가 아니다. 인류에게 지구의 몸이 보내는 메시지는 자연보호의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서 보다 근본적으로 생태윤리의 문제를 바라보게 한다. 그러한 문제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사실 우리의 삶과 아주 가까이에 있다. 바로 그것은 우리의 몸을 가로지르는 음식과 숨 쉬는 공기에 섞인 물질들과 연루된 것들이다.

생태비평가 스테이시 엘러이모(Stacy Alaimo)가 언급한 ‘흙 되기(becoming dirt/soil)’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흙은 우리가 먹는 식물과 동물이 ‘퇴비의 영양분을 흡수한 물질로 된 몸’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흙은 우리의 살이기도 하다. 자신의 배설물을 발효시켜 퇴비를 삼아 야채를 키우고 그것을 자신의 식탁에 올렸던 어느 예술가의 발효아트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오가는 물질의 순환 뿐 아니라 ‘흙으로 연장되는 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살충제와 제초제의 습관적인 사용은 흙에서 나오는 것에 의해 인간/식물/동물에게 체내화되는 독성 그리고 그로 인하여 “미래에 어쩌면 인간의 몸은 산업쓰레기로 재분류될 것”이라는 블랙유머가 시사하는 것처럼 신체와 정신에서의 변이의 문제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결국 흙의 문제는 비료산업을 살찌우는 자본주의의 이기적인 욕망과 무책임한 행위라는 사회정치적 이슈로 확장된다. 이런 차원에서 ‘흙 되기’란 ‘흙=자연’을 가리키는 단어로부터 사회정치적 용어로서의 ‘흙=문화’로 읽힌다. 즉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이 모호해지는 지점이 물질의 횡단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자연과 문화의 혼효현상은 인간 몸으로서의 지구와 그것에 연결된 인간 몸의 계급, 젠더, 인종과 연결될 때 이미지화된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이 줄곧 주장해온 것처럼, 여성을 자연의 무한한 생식력의 대지로 묘사할 때 자본이 착취하는 여성노동계급과 자연의 동일시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머니 대자연은 곧 여성’이라는 은유와 상징을 통해 여성의 착취는 자연을 수탈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라는 이러한 공식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몸에 축적되는 물질의 경험 및 자연과의 관계에 사회적 경제적 힘들이 어떻게 투과되는지 상상할 수 있다. 예컨대, 많은 경우 미국에서 환경오염에 중독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나 인디언 원주민 혹은 이민자들의 죽음처럼 안전장치 없는 산업재해에 내몰린 사람들의 몸은 인종차별의 말들(취약한 유전자, 과다한 술과 노름 등)로 규정되기 일쑤이다. 마찬가지로 환경재난에 의한 이민자의 발생은 빈부의 격차와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땅의 힘없는 자들의 신분과 무관하지 않다. 숭고한 자연은 이로써 오랫동안 찬양받아온 미학적 대상의 베일을 벗고 자본의 물질로서 도구화된 자신의 신체에 덧난 상처를 드러낸다. 환경정의(environmental justice)는 바로 그러한 자연의 몸과 인간의 신체에 가한 음모의 언어들을 찾아내는 일이 된다.

‘흙 되기’와 관련하여 한편 우리는 앞서 언급한 생태적 관점에서 ‘인간되기’를 생각해볼 수 있다. 마투라나와 바렐라(U. Maturana & F. Varela)에 의하면 생명시스템은 환경과의 긴밀한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경계를 재구성하는 능력 즉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시스템이다. 그리스어 ‘자기(auto)’와 ‘제작 혹은 생산(poiesis)’, 즉 자기조직화의 능력을 의미하는 오토포이에시스는 세포의 물질대사를 지속하고 세포에서 DNA를 복제함으로써 자신과 환경을 구분해내는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시스템이다.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말한 것처럼, 생명은 세상과 물질의 한가운데 있다가 반투명한 반투성 막에 의해 세상과 분리된 것일 게다. 그러나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은 복잡한 집합체의 생명체이다. 다만 생명은 환경과 확연히 구분될 수 있는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애쓸 뿐이다. 놀랍게도 인간은 겨우 10퍼센트만이 인간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90퍼센트는 미생물로 이루어진 공생적 집합체의 존재로 진화해 왔다. 마굴리스의 말을 빌리자면,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차이를 만들면서 생명은 시간을 구속하고 복잡성을 계속 확대하면서” 진화해 온 것이다. 생명은 생성되어가는 것 즉 ‘동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이 이러한 오염된 환경 속에서 어떤 집합체로서 공진화할 것인가이다.

지구라는 육체에서 자연과 인간의 몸을 착취와 파괴와 차별의 도살장에 몰아넣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비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 대신 서로가 서로를 새로운 존재로 창출하도록 돕는 ‘공산(sym-poiesis)의 사유’를 위해서, 새로운 생태적 ‘인간되기’가 필요하다. 제안하건대, 인간과 자연의 물질이 횡단하는 가운데 가능한 문화의 새로운 자기조직화를 꿈꾸어보자. <사이보그가 되다>의 저자들(김초엽, 김원영)은 스스로의 장애를 테크놀로지로 극복하는 것 이상의 포스트휴먼의 존재로서의 인간 정체성을 논한다. 이질적인 것들의 뒤섞임 즉 잡종적 주체성을 옹호하고, 기계와 유기체, 기술적인 것과 유기체적인 것 사이의 근본적 분리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 생물학자 도너 해러웨이(Donna Haraway)를 따라, 이들은 장애와 비장애,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단순히 기술유토피아의 추구가 아니라, 인간과 기술이 맺는 모순적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집단적으로 해결책을 찾아가는 몸들이야말로 현재 지구의 육체에 닥친 고통을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자들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슬라 헤이즈(Ursula Heise)가 언급했던 “지구에 대한 감각, 정치적·경제적·기술적·사회적·문화적·생태적 연결망이 우리 일상을 형성하는 방식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감각을 가진 생태-세계시민들(eco-cosmopolitan)이 모여 함께 창조하는 문화적 실천 즉 문화의 자기조직화를 모색해 보는 것은 어떠할까? 지금 이곳에서 열리는 융복합예술축제는 지구가 영원히 ‘푸른 별’의 육체이길 바라는 횡단하는 물질들의 생태교향곡의 서곡이 되리라 믿는다.


참고문헌
  • 스테이시 앨러이모,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윤준 김종갑 옮김, 그린비, 2018
  • 린 마굴리스, <생명이란 무엇인가?>, 김영 옮김, 리수, 2016
  • 도너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옮김, 책세상, 2019
  • 김초엽 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 유현주, <아도르노의 여성성 사유와 에코페미니즘-차이의 여성성을 위한 시론>, 예술과미디어(vol. 17, May), 2018